지금 여기 붉은 산수

  • 작성자 : G-Life
  •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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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이세현 작가

이세현 작가의 작업실은 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하고 있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온 직후부터 파주출판도시에 작업실을 마련했는데, 이번에 새로 마련한 작업실도 여전히 이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세현 작가의 일상은 대부분 경기도 파주에서 이루어진다. ⓒ 경기문화재단


전시나 미팅 등의 이유로 서울을 오가는 날도적지 않지만, 시간을 대부분 작업에 쏟는 작가의 일상은 이곳 경기도 파주에서 이루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종종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을 하는 작업실 근처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들 그리고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이웃의 소소한 일상사들은 붉은 산수의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자신이 일상에서 포착한 풍경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장소에 얼마나 다양한 감성들이 교차하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그의 산수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프가 되고 있다. 붉은 산수의 소재는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혹은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느낌들’이다. 그의 작업을 단순히 사생화 차원에 남겨둘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붉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세현 작가는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늦은 나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생활 내내 그는 유럽의 거대한 미술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자신을 위치 지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동양에서 온 나는 어떻게 이 거대한 서구의 주류 미술사적 흐름을 극복할 수 있을까?’를 자문하던 그의 눈에 띈 것이 바로 동양의 회화적 전통이었다. 겸재 정선이나 표암 강세황 등과 같은 조선 대가들의 산수화에서 그는 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먹이 아닌 붉은 안료로 한국의 산천을 담아낸 작품을 졸업전시에 출품했다.

그의 작업대 위 수십, 아니 수백 자루의 붓들이 이토록 붉게 물들게 된 것은,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보였던 작가의 경험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던 탓이다. ⓒ 경기문화재단


그렇다면 왜 붉은색이었을까? 그의 작업대 위 수십, 아니 수백 자루의 붓들이 이토록 붉게 물들게 된 것은,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보였던 작가의 경험이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던 탓이다. 작가는 군 복무 시절,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군사분계선 근처 전략 지대에서 야간 보초를 서곤했는데, 그때마다 야간 투시경을 썼다. 그 야간 투시경을 통해 보았던 비무장지대 DMZ의 산천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그때 그 붉은색은 위험하면서도 아름다운 이 땅의 모순된 실정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이세현에게 붉은색은 실재하는 풍경과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동시에 담아내는 가장 전략적인 아이템이 되고 있다. 그의 회화는 형식적으로는 선대의 산수화를 차용했지만, 전통 산수화가 온전한 유토피아를 포착하는 데 매달렸던 것과 달리, 이세현의 산수화는 현실과 이상 사이의 어딘가를 배회하는 중이다.

이세현 작가는 회화의 힘을 믿는다. ⓒ 경기문화재단


그는 아름다움 뒤에 가려진 모순된 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 예술가의 몫임을 강조한다. 그러한 신념은 그의 붉은 화면에 오롯이 녹아 있다. 그의 붉은 화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군함, 포탄, 쓰러져가는 건물 등의 풍광은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구석들을 속속들이 후벼 판다.

화면 속에는 군대에서 보았던 DMZ의 풍경이나 작가의 작업실에서 자전거로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임진강에서 보이는 풍경도 섞여 있고, 최근 뉴스를 통해 들려오는 비극적인 소식들, 작가의 기억 속에 들어차 있던 심상들, 인터넷에서 찾아낸 세상의 이모저모도 담겨 있다. 세상에 너무나 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이세현 작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회화의 힘을 믿는다.

경기지역 예술가 작업실 오픈 프로젝트
<옆집에 사는 예술가>란?
도내에 흩어져 창작활동에 매진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현재를 기록하고, 예술가들이 지역·지역민들과 소통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그들의 작업실을 공개하는 프로젝트이다. 2015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대중적이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예술가들의 일상이 녹아 있는 작업실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들로, 예술가와 도민이 함께 삶과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예술가에게는 도민들과의 만남이 작품을 탄생시킬 새로운 자극이자 원동력이기를, 그리고 참여한 도민에게는 예술가의 ‘작업실’이 지역사회의 중요한 자산이자 문화적 유산으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이 글은 경기문화재단의 경기지역 예술가 작업실 오픈 프로젝트 <옆집에 사는 예술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 김나리(독립기획자, 미술비평